해병대 출신 종합격투기 투사 차정환
목숨을 담보로 한 싸움을 하고도 고작 30만원 밖에 받지 못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더불어 그것이 무슨 스포츠냐고 비웃거나 질타하기도 한다. 실제로 종합격투기(MMA, Mixed Martial Arts)는 온 몸을 모두 쓰는 무질서한 싸움판 같아 보인다. 링이 아닌 철창에서 게임을 하기 때문에 흡사 과거의 노예 전사들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광경까지 연상된다. 이런 생사를 넘나드는 종합격투기에 매료돼 온갖 궁핍한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사투를 벌이는 한 사람이 있다. 프로 생활을 하면서도 연봉 200만원이면 많이 받는 것이라는 차정환 종합격투기 선수가 그 주인공이다. 차 선수(MMA STORY 관장)는 종합격투기 1세대 중 최고의 기량을 갖고 있는 프로임에도 이처럼 열악한 비인기 종목이라는 설움 때문에 온갖 경제적 어려움에 짓눌려 운동을 하고 있다. 그는 운동을 하면서 막노동·서빙 등 안해 본 일이 없을 정도가 돼 ‘알바 프로’가 됐을 정도다. 하지만 그의 이 같은 삶의 사투에는 남다른 열정이 배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종합격투기는 마치 무식한 싸움 같아 보이지만 그 속에 진정한 스포츠 투혼 정신과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2000년들어 유럽, 미국, 일본 등을 중심으로 속칭 ‘광팬’(광적인 팬)이 생긴 것도 이런 배경이다. 합기도, 태권도, 우슈(쿵푸 등 중국전통무술), 주짓수(브라질 무술) 등 도합 무술 10단이 넘는 차 선수는 선진국과는 상반된 국내의 열악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선수 생활을 하면서 체육관을 차려 후배양성에 나서고 있다. 한 달 벌이가 100만원밖에 안 되지만 후배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종합격투기 선수 저변확대에 사활을 걸고 있다. 스카이데일리가 돈벌이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면서도 목숨을 담보하는 종합격투기에 빠진 진정한 스포츠선수 차정환 관장을 휴먼 인터뷰했다. |
▲ 차정환 MMA STORY 관장 ⓒ스카이데일리
해외에는 이미 MMA란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MMA란 Mixed Martial Arts의 약자로 직역하면 ‘혼합된 격투의 예술’이란 뜻이다.
말 그대로 여러 가지 무술을 사용하고 그것이 허용된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는 10년 남짓해 아직까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스포츠이기도 하다.
비인기 종목이면서 생소하기까지 해 설움의 찬바람을 맞는 이 스포츠에 자신의 인생을 건 사람이 있다.
창동 MMA STORY 차정환(29) 관장은 우리나라 종합격투기 프로선수 1세대이다. 그는 현재 ‘프로종합격투기선수’ 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이 자리에 오기까지 그가 흘린 땀과 눈물을 생각하면 지금의 현실이 서럽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올림픽 정식종목도 아니고 인기종목도 아닌 이 스포츠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도전중이다.
5살까지 아버지란 말도 몰라, 어린시절 가장 역할
차 관장은 대략 8~10가구 정도만 살고 있고 하루에 버스도 몇 대 다니지 않았던 전형적인 경기도 포천의 한 시골마을 태생이다. 읍내 번화가까지 가려면 버스로 20~30분 정도를 이동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부모님은 별거를 하셨는데, 차 관장은 아버지의 다소 거친 성격 때문이라고 안타깝게 회고했다. 그는 5살때까지 아버지란 단어조차 몰랐다고 했다.
태어난 후 줄곧 친할머니, 어머니 이렇게 세 식구만이 살았다. 어렸을 적 할머니의 시집살이를 심하게 받곤 했던 홀로된 어머니를 보면서 항상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저는 어렸을 적엔 아버지의 존재를 몰랐습니다. 친할머니는 제가 태어난 후 줄곧 같이 살아서 외할머니인줄 알았어요. 이후
아버지가 따로 나가서 사시는 걸 알았는데 어머니는 제가 호적상 아버지없는 아이로 키우고 싶지 않으셔서 이혼은 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는 이렇게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할머니로부터 “집안에 남자는 너 하나다”라는 말을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안계신 집엔 항상 셋만 있었어요. 시골은 저녁 8시 이후엔 길에 사람도 없어서 해지기 전에 집에 들어가 꼭
문단속을 해야 했습니다. 어린시절 놀이터에서 남들은 저녁 먹으라고 부를 때 전 제가 먼저 가서 할머니 밥을 차려 드렸어요.
어머니가 일 끝나고 늦게 들어오시니까 할머니 저녁은 꼭 제가 챙겨드려야 했죠”
차 관장의 어머니는 2회의 허리수술로 장애 5급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차 관장의 학업을 위해 식당 주방일 등을 하며 경제적인 가장 역할을 하신 분이라고 자랑스러워 했다.
그는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고 전했다.
조용하고 평범한 학생이 학교짱(?)이 되다
차 관장은 ‘남자의 스포츠’라 불리는 프로 종합격투기 선수지만 평소엔 매우 조용하고 세심한 성격이다.
“중학교 1학년때 시골에 합기도 체육관이 하나 생겼습니다. 합기도를 배우러 다니면서 성격도 활발해지고 어떤 일을 하든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원래 성실한 성격을 가진데다가 좋아하는 것을 접하게 되니 그는 합기도에 푹 빠져 살았다. 고등학교 시절엔 전국 합기도 대련 대회에서 입상한 경험이 많다고 했다.
“보통 같이 다니던 친구들은 다 한 두달하고 운동을 그만 뒀어요. 처음 시작한 친구들 중에 저만 고등학교 졸업때까지
6년을 한결같이 도장에 다녔습니다. 학교 끝나고 체육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어느 때보다 좋았죠. 땀을 흘리면 흘릴수록 제가 강해지고
있다는걸 느끼게 됐습니다”
그는 그 지역에서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학교의 소위 말하는 짱(?)이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주변 학교까지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고 말했다.
“한번은 길 가다가 다른 학교 학생과 시비가 붙어 싸운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제가 이겼죠. 저는 단지 배운데로 했을뿐인데
그 상황을 보던 친구가 학교에 소문을 냈나 봅니다. 그 덕에 저는 다음날부터 학교에서 유명해졌습니다. 그래도 그 이후엔 도복을
입지 않고는 싸움을 한 적은 전혀 없습니다”
해병대에서 180도 바뀐 그의 인생
차 관장은 고등학교 졸업 후 가정 형편상 대학에 갈 능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진학을 과감히 포기했다. 군대를 다녀온 후 취업을 할 목적으로 졸업한 다음해에 바로 해병대에 지원했다.
“어렸을 적부터 해병대는 저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운동을 하면서부터 남자다움을 항상 동경했고, 해병대는 진정한 남자들이 모여있는 곳이라고 생각했죠. 해병대 만큼 전우간의 의리가 끈끈한 곳은 없다고 생각 했습니다.”
▲ 차 관장은 해병대 시절 종합격투기를 접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훈련소 퇴소직 후 군대 간부가 태권도 할 줄 아는 사람을 차출했습니다. 저는 합기도를 하면서 태권도를 4단까지 땄기
때문에 일단 따라갔죠. 거기서 자체적인 심사 후에 해병대 전체에서 200명을 뽑는 태권도 시범단에 차출 됐습니다. 태권도, 무적도
등의 각종 무술행사 시범행사에 여러번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해병대 생활은 그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생활이었다고 했다. 오히려 그에게는 재미있는 기억만 있다고 말한다.
“군 생활을 하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좁은 시골에서 살던 촌놈이 많은 사람을 만났고 군 생활 중에 종합격투기를
접했습니다. 취침 등이 꺼지면 저는 몰래 TV를 켜고 밤새 종합격투기를 봤습니다. 세상에 이런 스포츠가 다 있네 하면서 볼
때마다 환호성을 질렀죠. 저 때문에 잠못잔 후임들에게는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프로선수 전향, 한번 시합에 고작 30만원
차 관장이 군 생활 중에 접한 종합격투기는 제대한 후까지 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고 했다. 제대 후 무조건 종합격투기 선수가 될 생각에 빈 손으로 서울로 상경했다.
그때는 우리나라 이종격투기 도장이 서울에서도 몇군데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없었다고 한다. 돈 없이 체육관을 찾아다니는 것이 쉽지는 았았다고 했다.
상경한 후 며칠동안 반지하 친구 집에 얹혀 살며 방황하던 중에 그는 인터넷에서 무료로 종합격투기를 가르쳐 준다는 사람을
찾았다. 막상 만나보니 그는 대전 파트너를 구하는 사람이였고 차관장은 대전하면서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시작했다.
그렇게 종합격투기를 처음 접하게 된 차 관장은 몇 달이 지난 후 국내 종합격투기 대회의 시초인 ‘Spirit MC 아마추어 리그’에 출전하게 된다. 그는 운 좋게 승리를 거둔 후 다른 체육관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차 관장은 그 곳에서 좋은 사범을 만나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운동을 가르쳤다. 사범은 수강비를 받지 않았고 심지어 자신이 사는 집에서 같이 살 수 있도록 배려까지 했다. 차 관장은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 늦은 시간이 돼서야 자신의 운동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차 관장은 그 곳에서 좋은 사범을 만나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운동을 가르쳤다. 사범은 수강비를 받지 않았고 심지어 자신이 사는 집에서 같이 살 수 있도록 배려까지 했다. 차 관장은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 늦은 시간이 돼서야 자신의 운동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운동만 할수있으면 못할 게 없었어요. 그냥 샌드백을 치는게 좋았고 뒤엉켜서 구르는게 좋았습니다. 하루 20시간을 땀을 흘리고 피곤해도 그때되면 피곤이 다 사라지는거 같았어요”
그렇게 그는 몇 번의 아마추어 경기를 거치던 중 당시 아마추어 리그에서 선두를 달리던 선수와의 경기를 갖게 됐다.
“비록 경기는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종합격투기는 관객에게 얼마나 재미있는 경기를 보여주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그 선수는
저와 싸우기 전까진 모든 경기를 KO까지 이끌었는데 제가 최초로 판정까지 이끌고 갔습니다. 그 시합후 아마리그 4개월차인 저에게
프로리그 계약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저의 경기 스타일이 맘에 들었다고 들었습니다.”
정작 프로선수가 됐지만 한번 시합을 뛰고 받는 돈은 고작 30~50만원 정도에 불과했다. 비록 이기면 그 두 배를 받지만 경기횟수가 너무 적어 선수 생활만으로는 생계유지가 불가능 했다고 한다.
정작 프로선수가 됐지만 한번 시합을 뛰고 받는 돈은 고작 30~50만원 정도에 불과했다. 비록 이기면 그 두 배를 받지만 경기횟수가 너무 적어 선수 생활만으로는 생계유지가 불가능 했다고 한다.
▲ 차 관장은 과거에 부상과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시합 중인 모습(왼쪽)과 경기가 끝난 후 인터뷰 광경
일주일 동안 라면 끼니, 막노동·서빙 등 잡일로 생계
프로리그로 전향한 이후 몇 번의 시합을 거친 그는 어깨 부상을 당했다. 부상과 더불어 경제적인 상황 악화로 이 시기에 가장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힘든척 안하려고 집에는 돈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없어요. 운동을 해야 하니까 일에 소홀해지고 정상적인 직장보다는
아르바이트로 5~7년을 근근히 생활했죠. 월세에, 생활비에 정말 힘들 때는 일주일 동안 라면만 먹어본 적도 있고, 웬만큼 가까운
거리는 체력훈련 삼아 뛰어 다녔어요.”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어머니에게는 경제적인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부상으로 깁스를 하고도 건설 현장직과 은행건물 청원경찰, 호텔 벨보이, 서빙 등 닥치는 데로 일을 하며 재기만을 노렸다.
“부 상후 남들처럼 직장생활해 돈 열심히 벌면서 어머니 용돈도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했습니다. 어차피 몇 년 후면 저도 은퇴를 해야 될 나이가 오니까요. 어렸을적 허리수술 2번으로 장애5급 판정까지 받으시고도 저에게는 힘든 내색 한번 하신 적 없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났습니다.”
“부 상후 남들처럼 직장생활해 돈 열심히 벌면서 어머니 용돈도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했습니다. 어차피 몇 년 후면 저도 은퇴를 해야 될 나이가 오니까요. 어렸을적 허리수술 2번으로 장애5급 판정까지 받으시고도 저에게는 힘든 내색 한번 하신 적 없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났습니다.”
그는 이 시기가 본인의 인생 중에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도 있지만 그 보다 더한 것은 자신만 바라보는 어머니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부상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중 우연한 기회를 통해 재기에 성공했다. 시합에 출전하기로 한 선수의 부상으로 그는 일주일전에 시합 요청을 받고 그 시합에 출전할 기회를 얻었다.
▲ 차 관장은 부상후 우연찮게 기회를 잡고 재기에 완벽하게 성공했다.
“상 대는 ‘로스에바네즈’라고 UFC챔피언이였던 ‘BJ팬’ 선수의 제자였습니다. 그 당시에 종합격투기에서는 유명한 이름이였고 저도 사실 겁이 많이 났습니다. 경기 결과는 비록 졌지만 제 경기가 그 날의 명경기로 뽑히게 되고 그 기회를 통해 괌에서 열리는 대회 출전권을 얻었습니다. 그 경기에 출전해 웰터급 우승을 하고 완벽하게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그 당시 괌 교민신문에도 제 기사가 나간적이 있죠”
그는 성공적으로 재기를 했지만 이번엔 국내 유일의 단체였고 그가 계약한 국내 대회가 사라졌다. 그는 또 한번의 좌절을 겪고 결국 고향 집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낮에는 골프장 관리 일을 하고 저녁에는 사범을 하면서 밤낮으로 돈을 벌며 선수의 꿈을 접지 않았다. 하지만 열심히
일을 하는 차 관장을 보며 어머님이 기뻐하던 모습을 보여 그는 “내 꿈은 여기까지구나”라는 고민을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수개월을 지내던 중 일본에서 시합 제안이 들어왔다. 다른 선수의 부상으로 대신 시합에 참가하는 조건이었다. 상대선수는 일본 내에서는 최고라 불리는 선수였고 차 선수에 비해 지원 및 다른 조건들이 월등한 좋은 선수였다.
“사실 일본 챔피언 띠워주기식 경기였습니다. 당연히 지원하는 선수도 많지않았죠. 하지만 저는 이 경기를 제 은퇴경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경기에 모든 걸 걸고 결과에 상관없이 운동은 그만 두려고 했죠. 죽을 힘을 다해서 했습니다. 제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 지 제가 경기에서 이기게 됐습니다. 결국 그 대회를 계기로 다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국내에도 ‘Road FC’라는 단체가 생기게 되고 일본 경기에서 인상 깊은 경기를 치룬 차 관장은 그 단체와 계약해 지금도 프로선수로 시합에 출전하고 있다.
“국내 종합격투기 현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현재 차 관장은 서울 창동에서 ‘MMA STORY’라는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MMA STORY로 표현해 이름 지었다고 했다.
현재 차 관장은 서울 창동에서 ‘MMA STORY’라는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MMA STORY로 표현해 이름 지었다고 했다.
학원생이 50명 정도 되고 한달에 100만원 남짓한 이윤이 남는다고 했다. 그는 체육관을 운영하며 운동을 하는 후배들을 위해 숙식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했다.
▲ 차 관장은 후배양성과 선수생활을 동시에 하고 있다.
“예전 생활에 비하면 많이 편해진 겁니다. 운동도 하면서 돈을 벌수 있는 게 가장 좋습니다. 비록 경제적인 상황이 좋지 않지만 후배들과 같이 운동하고 선수생활을 계속 이어나갈 수만 있다면 지금 생활에 충분히 만족합니다.”
그는 지금도 본인이 운동을 시작한 것에 대해 절대 후회가 없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하지만 국내의 종합격투기 실정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비인기 종목이면서도 소수의 사람만 즐기는 스포츠라 상황은 매우 안좋다고 했다.
종합격투기는 주짓수(브라질 전통무술), 유도, 레슬링, 권투, 킥복싱 등 신체 모든 부위를 이용해 타격 및 방어를 하는
매우 위험한 스포츠다. 어느 한가지만 부족하거나 방심하면 선수들은 부상을 당하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는 경우도 발생한다.
비록 많이 위험하고 경제적인 보상도 좋지 않지만 이 스포츠의 매력에 빠져서 선수의 꿈을 키우는 사람이 많다. 차 관장은 그에 비하면 그나마 좋은 환경에서 운동을 하고 있지만 그 선수들의 상황이 너무 열악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세계 정상급 기량의 선수들이 많습니다. 한국은 모든 스포츠의 강국이죠. 단지 국민의 관심을 못받는 비인기 스포츠이기 때문에 그런 선수들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보통의 종합격투기 선수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30살이 되기 전에 운동을 그만 둡니다”
이 같이 그는 우리나라 종합격투기 선수들의 열악한 사정을 재차 강조했다. 자신처럼 고생한 만큼의 성과를 이루지 못하는 동료 선수들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또한 우리나라 종합격투기 실정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우리나라 종합격투기는 지금 그나마 프로 리그 한 개만 운영 중인데 그것 역시 원활하게 운영되진 않습니다. 사실 프로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이죠. 우리나라에서 일류급 선수들이 뛰는 무대이고 적어도 돈을 받고 경기에 참여하니까 프로라고 명칭을 붙인
겁니다. 결국 선수들은 유럽이나 미국, 일본 무대를 목표로 뛰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덧붙여 그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미국이나 유럽, 일본무대에서 뛰는 선수는 정말 극히 소수의 인원이며, 그 선수들 조차도 정말 힘든 과정을 거쳐 그 자리까지 올라갔다고 설명했다.
▲ 차 관장은 후배 선수들이 선택한 꿈을 이루도록 함께 뒹굴며 땀을 흘리는 것이 너무 좋다고 한다. 하지만 국내 상황은 종합격투기가 알려지지 않아 비인기 종목의 설움이 있다고 전했다.
그는 앞으로 선수나 사범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고 하며,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제 직업은 종합격투기 1세대 프로선수이자 사범 그리고 전도사입니다. 그 중에 어떤 것 하나 소홀히 하는건 절대 없죠.
우리나라 종합격투기 시장이 유럽이나 미국처럼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후배들도 현실에 불만을 말하기 보단 자신이
정한 신념대로 인생을 한번 걸어보는 것도 결코 나쁘지 않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꿈은 자신이 노력한 만큼만 현실이 됩니다.”
이종격투기와 종합격투기의 차이 | |||
이종격투기는 각각 다른 무술을 익힌 선수, 즉 두 개의 상반된 격투기가 동일한 룰을 통해 격돌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국내 널리 알려진 K-1이 이종격투기 룰을 적용하는 경기다. 반면 종합격투기는 넓게 보면 이종격투기 안에 포함되는 개념이나 한가지가 아닌 혼합된 무술을 익힌 선수들이 동일한 룰을 통해 격돌하게 되는 것이 그 차이다. UFC(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 종합 격투 선수권대회)가 가장 대표적인 경기로 손꼽힌다. 예를 들어 태권도를 익힌 선수와 복싱을 익힌 선수가 맞붙는다고 가정했을 때, 선수들은 이종격투기 룰에 따라 각각 태권도와 복싱만을 사용해 경기를 진행한다. 종합격투기는 이종격투기의 진화된 형태로 태권도, 복싱, 주짓수 등을 모두 익힌 선수 두명이 동일한 룰안에서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사용하여 이뤄진다. 서로 다른 무술을 사용한다는 데에는 크게 보면 두 가지가 동일하다고 할 수 있으나 선수들이 사용하는 격투 방식에 대해서는 종합격투기가 좀 더 다양하다고 볼수 있다. 도봉구 창동 MMA STORY 체육관추천 ★★★ 차정환 종합격투기 MMA Story 전격 오픈 ★★★ 1. 트레이닝 : 종합격투기(MMA), 킥복싱, 주짓수, 레슬링, 케틀벨 트레이닝 및 기능성 트레이닝 2. 위 치 : 서울시 도봉구 창동 254-3 (지하 철 창동역 2번출구 농협 맞은편, 도보 2분) 3. 문 의 : 070-8916-3036 010-3036-0780 http://cafe.daum.net/SongWooM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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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각철창을 둘러싼 수많은 격투기 팬들 사이로 한 한국인 사내가 등장한다. 올해 서른 살의 김동현. 탄탄한 체격의 이 동양인은 UFC 125 웰터급 경기에서 네이트 디아즈(25. 미국)를 3-0 판정으로 완벽하게 꺾는다. UFC 에서만 벌써 5연승.
UFC 통산 14승 1무 1무효. 동양에서 건너간 이 사내는 명실 공히 떠오르는 웰터급의 강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이종격투기 대회는 어디일까. 불과 몇 년 전만해도 PRIDE 와 K1, 그리고 UFC가 3대 무대로 꼽혔지만 PRIDE 가 UFC 에 인수되었고 K1 도 몰락의 길을 걸으면서 UFC 는 말 그대로 세계 최강의 사나이들이 몰리는 최고의 이종격투기 대회로 자리 잡았다.
전 세계 이종격투기 선수나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꿈의 무대. 이 대회에서 아시아 선수 최초로 5연승을 달리고 있는 김동현은 ‘스턴 건’ (Stun gun : 전기충격기) 라는 애칭까지 얻으며 연일 상종가를 치고 있다.
5연승 이후 쇄도하는 인터뷰와 화보 촬영 등으로 바쁜 일정을 바쁘고 있던 그는 ‘해병대’ 지의 인터뷰 요청에 흔쾌히 시간을 내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스턴 건’ 이라 불리는 이 남자는 해병대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시절부터 평범한 군 생활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남들과 달리 뭔가 다르고 힘든 곳에서 강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대학교에 입학 후에도 ‘대한 해병대’라는 비디오를 매일같이 보면서 멋진 군 생활을 상상하면서 주위의 친구들 모두와 같이 해병대에 자원입대 하게 됐습니다.”
해병 894기로 입대한 그는 2사단 1연대에서 보병으로 근무를 했다. 약 칠팔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지만 그는 전방 1년 예비대 1년 군생활을 했다며, 그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당시 저희 중대장님이셨던 오헌석 중대장님이 마라톤 선수 출신이었습니다. 2년 동안 매일같이 구보를 중요하게 생각 하셨는데 지금도 잊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던 기억이 남습니다. 그리고 훈련 또한 그 어떤 중대장님보다 모범을 보이셨고 사단 최우수중대로 뽑혔던 기억이 남습니다.”
사실 운동선수 삶은 훈련의 연속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하루하루 지옥훈련의 연속인 그네들의 삶과 비교했을 때 해병대의 훈련은 어느 정도 수준이었을까.
“체력적으로만 따진다면 지금의 훈련이 더 힘들 수 있겠지만 정신적인 면까지 더해지면 상황이 다릅니다. 오히려 장시간 행군이라던지 혹한기에 A텐트에서의 숙영 등 정신적으로도 무장이 필요한 해병대의 훈련이 더 힘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지옥 같았던 유격훈련 때의 PT 도 생각나고 빨간 명찰을 달았을 때는 앞으로 2년간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이처럼 강인한 훈련을 통해 키운 체력과 정신력은 전역 후 선수생활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육체적으로도 도움이 많이 되었지만 그보다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해병대에서 선후임간의 계급생활도 지금의 사회생활이나 팀내에서의 대인관계에서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가 격투기 팬 뿐만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UFC에서 승승장구를 하면서 부터이다. UFC 5연승. 14승 무패의 기록 등 화려하게만 보이는 경력이지만 그에게도 힘겨운 시절은 있었다.
고 2때 이종격투기에 빠져 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했고 2003년 국내 대회에서 우승하며 촉망받는 유망주로 떠올랐지만 그 길이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3달에 1번 정도 시합을 하지만 손에 쥐는 파이트 머니는 고작 50만원 수준. 먹고 살 길을 찾아 옷 장사나 하수구를 뚫는 일 등을 닥치는대로 했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 달 15만원짜리 고시원 쪽 방에서 밥을 물에 말아 스팸과 함께 허기를 때우곤 했다. 흔히 운동이 너무 힘들어 세상일에 뛰어들곤 하지만, 그는 세상일이 너무 힘들어 다시 운동으로 뛰어 들었다. 싸우는 것이 제일 쉬웠다는 것이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릎쓰고 다시 진출한 이종격투기. 가시밭을 걸어온 아들을 다시 링으로 보내는 것을 반대하는 부모님은 단 한 번이라도 진다면 링을 떠나겠다고 설득했다. 그렇게 그는 일본에서 7연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더 큰 무대로 진출하고 싶은 그의 열망은 더욱 커져만 갔다.
“7연승을 했지만 큰 무대에 진출하지 못해서 답답할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참고 기다리고 열심히 하다 보니 지금의 영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는 말이 그 당시 가장 떠올랐던 말입니다. 이 말 또한 군 생활할 때 배웠던 것이고요.”
그렇게 그는 UFC 에 진출한다. 초청장이 한 장 밖에 나오지 않아 매니저나 팀 닥터 없이 홀로 미국을 가기도 했다. 통역이 없어 경기를 관람 온 유학생이 즉석에서 통역을 해주기도 했다.
그런 그가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추성훈이나 최홍만, 데니스 강 같은 파이터의 네임밸류에는 한참 못 미치던 그의 이름이 슬슬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 시작했다. 어느 새 14승. 그리고 파죽의 5연승. 인터뷰와 CF, 방송 출연이 연이을 정도로 그의 인기는 상종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UFC 내에서의 입지는 더욱 커져, 2011년에도 5경기의 계약이 이미 끝난 상태이다. 최근에는 UFC 메거진을 통해서도 가장 주목할만한 선수로 소개되기도 했다. 참을 인자를 수십번씩 세기며 끝없이 연습하고 연습한 결과였다.
“힘들었던 순간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해병대에서 군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내하고 기다리다보면 언젠가는 영광스러운 순간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죠.”
1승도 거두지 못하고 링을 떠나는 파이터들이 즐비한 UFC. 아니 링 위에 오르기조차 힘겨운 UFC에서 그는 이제 명실공이 웰터급의 강자로 부상했다. 싸움을 즐기는 사나이인 그는 링 위에 오를 때의 기분을 마치 해병대에서 훈련 받을 때의 기분과 같다고 얘기한다.
“훈련을 받을 때 누구나 두렵고 긴장되지만 막상 지나고 나면 그 순간 그 기분을 또 느끼게 위해 다시 도전하게 됩니다. 시합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번지점프를 할 때의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격투기를 정말 즐기는 듯한 그 사나이의 목표는 웰터급 챔피언. 그러기 위해선 현재 UFC 웰터급의 절대 강자인 ‘조르 주 생피에르(이하 GSP)’를 꺾어야 한다. 김동현 역시 그의 목표가 GSP 임을 밝혔고, 이종격투기 전문가들도 GSP를 꺾을 거의 유일한 대항마로 김동현을 주목하고 있다.
“UFC는 절대강자가 없을 정도로 강자가 많습니다. 그런데 GSP는 그 모든 강자를 누른 현재 최강의 선수이기에 얼마나 강한지 싸워보고 싶습니다. 물론 GSP 에게 도전하기 위해서는 앞으로의 두 경기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두 경기를 멋지게 이긴다면 년 내에 GSP 와 붙게 될 가능성도 많습니다. 물론 앞으로의 두 경기 상대도 쉽지 않은 상대가 되겠지만요.”
GSP를 꺾고 웰터급 챔피언이 되기 위한 길은 쉽지많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앞이 안 보일정도로 먼 것 또한 아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흥분해서 당황하지 않는 침착함과 서양선수들이 갖고 있지 않는 유도 밸런스를 바탕으로 체력과 타격을 보완한다면 한 번 해볼만하다는 것이 그의 평이다. 이제 서른에 접어든 그의 전성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종격투기에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UFC의 현 챔피언들도 거의 30대 초 중반입니다. UFC에서 연패를 하는 선수는 거의 퇴출이기 때문에 퇴출되기 전까지는 나이와 관계없이 보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퇴출되기 전까지 나이와 관계없이 링에 오르겠다는 김동현. 무엇이 그를 이종격투기에 미치게 만드는 것일까.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남자는 누구인가라는 해답을 내줄 수 있는 스포츠와 가장 가까운 종목이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분들이 본다면 그냥 막무가내로 싸우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모든 것이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훈련을 통해 나온 기술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말 처럼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남자에 도전하고 있다. 이제 전 세계 이종격투기 팬이 주목하고 있는 ‘스턴 건’ 김동현.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해병 894기 김동현 선수는 자신이 2년간 청춘을 보낸 해병대에 대한 애정을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듯 했다. 특히 연평도 포격도발 당시 목숨을 걸고 싸운 후배 해병들의 이야기를 빼놓지 말라고 당부했다.
“저 또한 해병대 최전선에서 군생활을 했습니다. 항상 최전선에서 소수의 인원으로 더 많은 고생을 하고 있는걸 알기에 이번 소식을 들을 때 너무나도 안타까웠습니다. 최근 현빈의 해병대 입대 등 해병대에 대한 인기가 매우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더라도 그 후배들의 희생을 우리는 잊으면 안 됩니다.”
지난 경기 때 입은 부상에서의 회복, 훈련은 물론 쉬지 않고 밀려드는 인터뷰와 촬영, 방송출연 등 바쁜 스케쥴에도 그는 해병대의 인터뷰 요청에 귀한 시간을 쪼개 성심성의껏 답변을 해주었다. 그리고 청춘을 바쳐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후배 해병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다는 얘기를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가장 힘들었던 기억이 가장 달콤한 추억으로 남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2년간의 군 생활이 힘들겠지만 훗날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에 가장 달콤하고 멋진 군생활로 만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아무것도 늦은 것이 없습니다. 2년간의 군 생활을 미래에 대해 많은 고민도 하고 계획을 짜는 시간으로 생각하세요. 군 생활을 마치고 다시 도전해도 늦지 않았습니다. 저 또한 UFC에 입성한게 28살이었으니까요. 해병대를 전역하면 사회에서 그 어떤 어려운 상황이 와도 다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후배 해병 여러분! 파이팅!”
마치 굵은 동아줄이 온 몸을 죄는 것 같았다, 시범을 한번 보여달라는 기자의 부탁에 그는 트라이앵글(삼각 조르기)에서 암바(팔 꺾기)로 이어지는 이종격투기 기술로 순식간에 기자의 몸을 옭아맸다.
팔에 통증을 느끼는 순간 이번엔 초크로 바로 목을 죈다. 순간 눈 앞이 깜깜해졌다. 매트를 치며 "졌다"고 말하자 그제야 풀어주며 선하게 웃는다.
'스턴 건'(Stun gun:전기충격기)이라 불리며 미국의 종합이종격투기시합인 UFC(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 대회에서 아시아 선수 최초로 5연승을 한 김동현(30, 부산팀매드) 선수.
UFC는 K-1, PRIDE FC와 함께 세계 3대 이종격투기로 8각형 철장안에서 최소한의 룰로 싸우게 하는 종합격투기 대회다. 추성훈, 데니스 강과 같은 유명한 선수들도 각기 1승 2패의 전적을 기록했을 정도로 문턱이 높다.
김동현은 UFC의 5연승을 포함해 종합전적 14승 1무 1무효로 무패의 전적을 자랑하고 있다. 김동현 선수가 훈련중인 부산시 동대신동의 '팀매드' 체육관을 찾아 갔다. 키 184Cm에 몸무게 77Kg의 군살 없는 몸매의 그는 지난 2일 네이트 디아즈와의 경기후 여전히 얼굴이 부어있었다. 왼쪽 다리 인대도 부상을 입었다.
◆싸우는 게 제일 쉬웠어요
"고2 때 일본선수의 경기를 보고 이종격투기에 빠지기 시작했어요. 남성미에 반했다고 할까요. 2003년 9월 국내 대회인 KPW에서 우승하며 본격 시작했습니다."
그 러나 국내 대회의 파이터 머니는 고작 50만원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3달에 1번 시합을 할 때도 있었다. 결국 그는 2005년에는 남대문 시장에서 월 70만원의 옷장사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막힌 하수도 뚫는 일 등을 닥치는 대로 했다. 구박도 많이 받았고 배고픔도 많이 겪었다.
"이종격투기선수였다는 사실을 몰랐던 사장이 옷을 적게 판다고 구박도 많이 했지요. 하루 14시간 씩 서서 옷을 팔고 서울역 근처의 고시원에서 한 달에 15만원씩 주고 살았습니다. 고시원에서 공짜로 주는 밥을 물에 말아 스팸과 함께 먹으며 생활했었어요. 세상일이 힘들어 운동을 다시 하고 싶었어요. 역시 제게는 싸우는 일이 제일 쉬웠어요."
하지만 맏아들이 이종격투기를 하는데, 부모님들은 위험하다고 한사코 반대했다. 2006년 일본의 종합격투기단체인 DEEP에 진출하며 그는 "한번이라도 지면 포기하겠다"는 말로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렇게 진출한 일본에서 2006년 3승, 2007년 4승을 챙기며 7승 1무의 전적을 거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김길철(55)씨는 아직도 가슴이 떨려 생방송으로는 경기를 못 본다고 한다.
동양의 작은 선수가 UFC에 진출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2차전 때는 UFC로부터 초대장이 달랑 선수 1명에게만 나와 코치와 통역도 없이 혼자 미국으로 건너갔다.
시차 적응 실패로 잠도 부족하고 음식이 맞지 않아 시합 전까지 설사를 했다. 시합 구경 온 유학생이 즉석 통역을 맡아주고 세컨까지 봐주는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결과는 2:1 판정승.
"정말 상대 선수를 마주 잡았을 때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버티고 버티어 결국 이겼어요."
이렇게 5연승을 거둔 지금 그를 보는 시각은 이미 많이 달라져 있다. 파이터 머니도 경기당 2200만원에서 4500만원으로 올랐다. 승리 수당 4500만원은 별도다.
3년 동안 그를 훈련시킨 코치 양성훈씨는 "상대와 싸우기 3개월 전부터 선수의 특징을 비디오로 분석하며 훈련을 한다. 동현이의 그라운드 포지션과 압박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어서 누구와 붙어도 승산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해병대(894기) 출신이다. 연평도 포격 때 후배들의 죽음에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 미국에서 인터뷰할 때도 기자들에게 연평도 사건 이후에도 한국이 안전한 나라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연평도 사건 당시 후배 해병들이 죽는 것을 보고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UFC에는 북 선수와 만날기회가 없어서 때려줄 수도 없고...(웃음)"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해병정신'은 그의 경기에도 묻어난다. "웰터급 챔피언인 조르주 생 피에르는 물론이고, 체급만 맞으면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 표도르와도 붙어보고 싶다"며 투지를 보인다.
일부 이종격투기 선수처럼 영화나 연기를 해볼 생각이 있냐는 질문에 그는 "천성이 연기에는 소질이 없다"며 손사랠 쳤다. 그는 오직 세계 최강의 파이터가 되는 것만을 꿈꾼다.
온라인 편집국=김정록 기자 ilro12@joongang.co.kr
※ UFC는 미국과 국내를 포함해 전 세계 100여 개 국에 방송되며 총 시장규모가 1조원에 이른다. 미국에서는 유료임에도 불구하고 100만 가구가 시청한다. 국내 이종격투기 선수가 100여 명 정도인 것으로 추산할 때, 김동현 선수의 UFC진출은 야구에 비하면 국내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것과 비견된다.
해병대출신 종합격투기 선수들
2008/05/21 13:56
[본문스크랩] 해병대출신 이중격투기 선수들 | 기억하고 싶은 글 | 2008/05/17 11:4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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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용석 해병 764기 출생 : 1976년 신체 : 키177cm, 체중65kg 직업 : 이종격투기선수 소속 : 고용석이종격투기체육관 수상 : 프로복싱 신인왕전 준우승 특이사항 : 해병대 무적도 시범단 출신 얼마전에 특전사출신파이터 김종만선수와 K1서울대회에서 대결로 유명하셨던 선배님이시죠...^^ 2. 이면주 해병 782기 출생 : 1977년 1월 15일 신체 : 키187cm, 체중88kg 직업 : 이종격투기선수 학력 : 옥천공업고등학교 종목 : 스피릿 MC 소속 : 제왕회관 경력 : 2003년 스피릿MC 1회대회 챔피언 출신교: 충북 옥천공고졸 총전적: 23전 20승 3패 14KO승 -이종격투기 스피릿MC 초대 무제한급 참피언 전.한국무에타이연합회 헤비급 참피언 전.세계프로태권도연맹 미들급 참피언 전.세계격투사협회 무제한급 참피언 현.한국무에타이협회 헤비급랭킹1위 -1998년도 무에타이 국가대표 -2000년도 무에타이 국가대표 - 국제킥복싱연맹(1995.4.8). 95전국 킥복싱 신인왕전 헤비급 우승 - 대한권격도협회(1995.7.30). 전국 권격도 신인왕 대회 헤비급 우승 - 세계프로태권도연맹(1995.9.17). 전국 프로태권도 신인왕전 미들급 준우승 - 세계프로태권도연맹(1995.1112). 세계 프로태권도 체급별 참피언 결정전 미들급 참피언 획득 - 국제권격도연맹(1996.4.14) 전국 권격도 대회 헤비급 권왕전 승 - 국제킥복싱연맹(1996.5.26) 한국 킥복싱 체급별 랭킹전 헤비급 출전 - 한국무에타이연합회(1998.6.6) 한국 무에타이 국가대표 지역 선발전 헤비급 우승 - 한국무에타이연합회(1998.7.5) 세계 무에타이 킹스컵대회 대표 및 국가대표 겸 한국참피언쉽 헤비급 참피언 획득 - 세계격투사협회(1998.9.27) 세계 실전 격투사 무제한급 참피언 획득 - 한국무에타이연맹(2000.8.27) 레바논 아시아선수권대회 파견 국가대표 선수선발전 예선대회 크루져급 우승 - 한국무에타이연맹(2000.10.8) 레바논 아시아선수권대회 파견 국가대표 선수선발전 결승대회 크루져급 승 - 한국무에타이연맹(2001.08.18) 2001년도 제1차 한국 무에타이 최강자전 라이트헤비급 우승 - 태국 쫑꼰요다시릳(2002.04.13) 마약퇴치를 위한 무에타이 태국.한국 국제전 헤비급 승 vs 루윋레오참랑씯(태국) - 태국 쫑꼰요다시릳(2002.04.28) 쓱 무아이타이 딴 파이야 쌥딕 태국 한국,일본 국제전 헤비급 승 vs 스타보이(태국) - 스피릿코리아(2003.04.26) 이종격투기대회 스피릿MC 초대 무제한급 참피언 획득 vs 이은수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파이터선배님으로써...단지 아쉬운면이라면 실력은 비해 국제대회에서는 판정등에서 항상 불운을 달고 다닌다고 해야 할까요~ 3. 곽윤섭 해병 779기 출생:1976년 신장:181cm, 몸무게:82Kg 스타일 : 권격도, 킥복싱 타이틀 : -1995년 합기도 전국대회 헤비급 1위 -권격도 헤비급 신인왕 -2001년 권격도 타이틀 매치 -권격도 12전 10승 2패 -킥복싱 18전 15승 3패 |